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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락도 8폭 병풍(魚樂圖八幅屛風), 조선, 세로 70cm, 가로 32cm

관련정보 MEDIA N | 국립민속박물관

매란 4폭 병풍(梅蘭四幅屛風), 조선, 세로 122.5cm, 가로 49.7cm

관련정보 MEDIA N | 국립민속박물관

호렵도 8폭 병풍(胡獵圖八幅屛風), 조선, 세로 122cm, 가로 318cm

산을 배경으로 호복(胡服)을 착용한 인물들이 짐승을 사냥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지본채색(紙本彩色). 화폭(세로 78, 가로33). 각 폭마다 표범, 멧돼지, 사슴, 새 등 짐승을 사냥하는 모습, 기를 든 사냥행렬 등이 묘사됨. 화면 주위는 비단으로 장황(裝潢)됨. 관련정보 MEDIA N | 국립민속박물관

경직도 12폭 병풍(耕織圖 十二幅 屛風), 조선, 세로 137.2cm, 가로 406.8cm

농사짓는 일과 함께 풍속장면이 12달의 시간 흐름에 따라 그려진 12폭 병풍. 면본채색(綿本彩色). 화폭(세로 118, 가로 30.3). 1폭부터 12폭까지 정월 대보름 달맞이, 땅에 거름주기, 논밭갈기, 김매기, 추수 후 탈곡과 방아 찧는 장면 등에 이르는 농사짓는 일과 물레질, 베날기, 씨아질, 베틀질, 옷감널기 등의 옷감짜는 모습을 시간의 추이에 따라 그려짐. 관련정보 MEDIA N | 국립민속박물관

기명절지도 10폭 병풍(器皿折枝圖 十幅 屛風), 조선, 세로 127.1cm, 가로 35cm

동양화가 우향 우형 임경수(雨香 林景洙)가 기명도(器皿圖)와 절지도(折枝圖)를 합쳐 그린 10폭 병풍 그림. 지본담채(紙本淡彩). 낱장으로 배접(褙接)됨. 각 폭에 고동기(古銅器), 화병, 매화, 모란, 석류, 포도, 호박, 난, 파, 배, 밤 나뭇가지, 나팔꽃, 무, 배추, 장미 등이 그려짐. 화면(畵面)에 화제(畫題)가 묵서되고 주문방인(朱文方印)과 백문방인(白文方印)이 찍혀있음. 관련정보 MEDIA N | 국립민속박물관

어해도 병풍, 조선

지본채색. 매화 연 등의 꽃, 조개와 다양한 물고기들이 어우러진 그림. 琳田 趙廷奎(1791 - ?)의 작품으로, 화원이었던 임전은 어해도를 잘그렸다. 여덟번째 폭 하단에 낙관이 있음. 8폭 병풍 관련정보 MEDIA N | 국립민속박물관

모란도 병풍(牧丹圖 屛風), 조선, 가로 182.8cm, 세로 263.9cm, 가로(화면) 255.3cm, 세로(화면) 160.0cm

비단 바탕에 채색으로 그린 4폭의 화훼도(花卉圖) 병풍이다. 화폭마다 좌측의 하단에는 청록색의 괴석(怪石)과 토파(土坡)를 그려 넣은 다음, 상단의 공간에는 붉은 색과 흰색의 화려한 모란을 그려 넣었다. 그림의 상단은 아무 것도 그려 넣지 않은 빈 공간으로 여백을 주었다. 작가와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양식으로 보아 궁중 화원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정보 MEDIA N | 국립고궁박물관

화조도 병풍(花鳥圖 屛風), 조선, 가로 54.8cm, 세로 168.2cm

종이 바탕에 채색으로 그린 4폭의 화조도(花鳥圖) 병풍이다. 전체적으로는 밝은 색채를 사용하였으며, 각 폭마다 각종의 꽃과 새, 동물을 화면 전체에 그려져 있다. 각 폭마다 하단 한쪽에는 청색과 녹색, 붉은 색의 바위를 놓고 그 위로 쌍을 이루는 새를 표현하였는데, 새는 각 쌍마다 마주보거나 평행구도를 이루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사이의 공간은 국화, 매화 등의 화려한 꽃이 핀 나뭇가지를 드리워 표현하였다.  각 폭에 보이는 하늘을 나는 새는 다른 화조화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도식적인 표현이다. 꽃의 표현은 정확한 사실이 아닌 과장이 된 것으로 꽃은 새보다 훨씬 크게 그려졌다. 각 폭의 바위 표현은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장식적으로 채색을 가했다.  제2폭에는 어두운 밤 보름달이 뜬 배경에 백매화꽃이 드리워진 나뭇가지 아래로 정답게 노니는 한 쌍의 꿩이 인상적이다. 화면에 낙관(落款)이나 제발(題跋)이 없어서 이 그림을 그린 작가는 알 수 없다. 다만 궁중에서 사용한 장식용 그림이기에 궁중의 각종 화사(畵事)를 담당했던 화원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의 상단과 하단은 무늬가 있는 청색과 자색 비단으로 장황하였다. 관련정보 MEDIA N | 국립고궁박물관

화조도 병풍(花鳥圖屛風), 조선, 가로 54.8cm, 세로 167.3cm

종이 바탕에 채색으로 그린 4폭 화조도(花鳥圖) 병풍이다. 각 폭마다 각종의 꽃과 새, 동물을 화면 전체에 그렸다. 화폭의 하단 한쪽에는 청색과 녹색, 붉은 색의 바위를 놓고 그 위로 쌍을 이루는 새와 동물을 표현하였는데, 각 쌍마다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사이의 공간은 국화, 매화 등의 화려한 꽃이 핀 나뭇가지를 드리워 표현하였다.  각 폭에 보이는 하늘을 나는 새는 다른 화조화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도식적인 표현이다. 꽃의 표현은 정확한 사실이 아닌 과장이 된 것으로 꽃은 새보다 훨씬 크게 그려졌다. 각 폭의 바위 표현은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장식적으로 채색을 가했다. 제4폭에는 어두운 밤 보름달이 뜬 배경에 백매화꽃이 핀 가지를 표현하고, 아래쪽에는 작은 물줄기가 내려오고 있는 장면을 표현하였다. 화면에 낙관(落款)이나 제발(題跋)이 없어서 이 그림을 그린 작가는 알 수 없다. 다만 궁중에서 사용한 장식용 그림이기에 궁중의 각종 화사(畵事)를 담당했던 화원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의 상단과 하단은 무늬가 있는 청색과 자색 비단으로 장황하였다. 관련정보 MEDIA N | 국립고궁박물관

화조도 병풍(花鳥圖 屛風), 조선, 가로 185.2cm, 세로 97.8cm

비단 바탕에 채색으로 그린 4폭의 화조도(花鳥圖) 병풍이다. 4폭의 화면은 전체가 하나의 그림으로 이어지도록 구성되어 있는데, 연꽃이 핀 연못에서 노니는 다양한 새와 그 위를 날아다니는 새들이 표현되어 있다. 제1폭과 제2폭의 하단에는 청록색의 바위를 그리고 그 위쪽을 노니는 새들이 있으며, 가운데 부분에는 연꽃이 만개한 연잎과 가지 사이, 연못에서 유유히 노니는 오리 가족들의 모습이 보인다. 제3폭과 제4폭의 하단에는 만개한 연꽃과 터질 듯 꽉 찬 기운을 머금고 있는 연봉우리와 연잎, 가지들을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병풍은 무늬가 있는 청색과 자색 비단을 테두리에 둘렀다. 관련정보 MEDIA N | 국립고궁박물관

문방도 병풍(文房圖 屛風), 조선, 가로 242.0cm, 세로 195.5cm

책거리도(冊巨里圖)로 꾸민 4폭 병풍으로 종이 바탕에 채색을 하였다. 화면의 구성을 살펴보면 문양이 있는 장막 뒤에 책과 두루마리, 다양한 기형의 진귀한 자기, 고동기, 옥기, 여의나 산호, 수선화, 공작 깃털 등의 완상용 골동품 및 벼루, 필통, 먹과 같은 문구류를 그렸다. 화면의 구성은 사실적인 공간이 설정되지 않고 평면적으로 기물들이 배치됨에 따라 장식성이 극대화되었다. 푸른색과 붉은색 비단으로 장황하였다. 관련정보 MEDIA N | 국립고궁박물관

책가도 병풍(冊架圖 屛風), 조선, 가로 45.5cm, 세로 206.5cm

책거리도(冊巨里圖)로 꾸민 10폭 병풍으로 비단 바탕에 채색을 하였다. 각 폭마다 다른 기물은 그리지 않고 책으로만 가득 찬 삼단의 책가를 그렸다. 책가의 형태를 살펴보면 1단과 3단이 좌우 두 칸으로 나누어져 있고 2단 위쪽에 장식이 있는 것과 1단과 3단 위쪽에 장식이 있고 2단이 좌우 두 칸으로 나누어진 것이 번갈아 가며 배치되어 있다. 책가 안의 책은 크기나 쌓는 법, 포갑이 있는 책을 배치하여 조금씩 변화를 주었다. 관련정보 MEDIA N | 국립고궁박물관

목제흑칠채화병풍(木製黑漆彩畵屛風), 미얀마, 세로 226.0cm, 가로 182.5cm

앞을 보지 못하는 부모의 눈을 뜨게 하려고 매일 아침 정한수를 떠오는 효자가 사슴 사냥에 나선 피에릿카 왕의 독화살에 맞아 의식을 잃고 만다. 그러나 제석천(帝釋天)이 그동안의 효성에 대한 보답으로 반약을 건네주자, 자식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하였다. 왕은 지난 잘못을 뉘우치고 부모의 눈을 뜨게 해준다.  이 이야기는 미얀마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문학과 연극, 인형극 주제에 자주 쓰인다. 효자의 이름을 미얀마에서는 투 운 나 타마라고 부르며 친근하게 여긴다. 병풍 중앙에는 두 인물이 묘사되어 있다. 오른쪽 항아리를 어깨에 진 것이 투운나 타마이며, 왼쪽이 피에릿카왕이다. 자식의 오른쪽 아래에 앉아 있는 이가 부모이다. 부모 위로 구름을 타고 있는 이가 제석천이며, 그 오른쪽에는 물가에서 물을 뜨는 자식과 사슴사냥에 나선 왕이 있다.  왼쪽 위에는 부모가 사는 집이 있으며, 최하단에는 사슴들이 무리지어 있다. 원래 인도에서 생겨난 이야기이지만, 여기서는 용모며 복장 및 지물 모두가 미얀마식으로 되어 있다. 한 사람의 장인이 여러 사람의 협력을 얻어 완성하였다. 전통을 충분히 수용한 현대식 칠 조형으로 높이 평가된다. 관련정보 MEDIA N | 국립중앙박물관

병풍, 조선

방 (房)이나 마루 등에 쳐서 바람을 막고 공간을 가리거나 장식하는 도구. 장방형의 10폭 병풍(세로 167, 가로 41.7). 검정색 명주 바탕에 금색 안료를 사용하여 간단한 도형 형태를 그리고 전서, 초서, 예서체로 설명을 달아 꾸밈. 관련정보 MEDIA N | 국립민속박물관

작호도 6폭 병풍(鵲虎圖六幅屛風), 조선, 세로 221cm, 가로 366cm

관련정보 MEDIA N | 국립민속박물관

백자도 병풍(百子圖屛風), 조선, 가로 296.2cm, 세로 96.0cm

여러 명의 어린이들이 괴석과 나무, 전각 등을 배경으로 즐겁고 평화롭게 놀이하는 모습을 그린 백자도(百子圖)로 꾸민 6폭 병풍이다. 6폭의 화면은 토파(土坡)나 나무, 건물로 각 두 폭씩 구분되고 이러한 장면 구분에 따라 아이들의 놀이모습을 그려 넣었다.  1·2폭 화면 하단에 커다란 연못이 있다. 화면 하단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넓은 연못은 시선을 그림의 안쪽으로 끌어당긴다. 연꽃이 흐드러진 연못에서 아이들은 물고기를 잡기도 하고, 연꽃 빼앗기 놀이를 하고 있다. 2폭의 왼쪽으로 팔작지붕의 누각에는 두 아이가 있는데, 연꽃을 들고 있는 아이가 연잎 위에 앉아있던 다른 그림과는 달리 연꽃을 구하러 온 아이가 연잎에 앉아있어 도상에 혼란을 빚고 있다. 연못가 아래 버드나무에서 아이들이 풀놀이를 하고 있다.  아이들 뒤의 짙은 푸른색 태호석(太湖石)과 괴이한 형태의 바위, 붉은 색 난간 뒤로는 모호한 공간이 암시되어 있다. 그 옆에는 하얀 사슴이 묘사되어 있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형성한다. 바위 너머에는 오색구름이 화면 전체에 드리워져 있고 그 사이로 홍살문과 주렴을 친 전각의 사모지붕, 휘날리는 깃발이 꽂힌 기둥이 보인다. 화면의 왼쪽은 평행사선구도의 수중누각과 버드나무, 화면 하단의 청록색 토파에 의해 3폭과 구분된다.  토파와 버드나무로 1·2폭과 구분되는 3폭에 그려진 건물의 회랑이 3·4폭을 연결하고 있다. 평행사선구도의 꺾인 건물 하단의 모서리들은 전경에 넓은 뜰을 만들고 있다. 전각 앞에는 행차장면에 늘 그려지는 오동나무가 있고 회랑 너머에는 키가 큰 나무와 괴석들이 하늘로 솟아있다. 5폭에도 전각이 있고 그 앞의 마당에 원숭이를 둘러싼 아이들이 있다.  건물 옆으로 이어진 분홍색 담장은 제 6폭으로 이어지며 담장에 뚫린 통로는 담장 뒤뜰과 연결된다. 뒤뜰의 공간은 평행사선구도로 표현된 하얀 난간에 의해 공간이 뒤로 확장되고 있다. 그곳에 있는 매화나무에 아이들이 매달려 매화를 따고 있다. 6폭의 왼쪽에는 전경의 청록색 토

삼국지도 10폭 병풍(三國志圖 十幅 屛風), 조선, 전체길이 143.0cm, 전체너비 445.0cm, 세로 115.3cm, 가로 40.0cm

삼국지연의도(三國志演義圖)는 일찍이 조선에 유입되어 인기를 얻었는데, 삼국지연의가 가지는 역사인식이 조선의 성리학적 이념과 맞았기 때문이다. 특히 민간신앙으로 관우신앙이 성행하여 전국 곳곳에 관왕묘가 설치될 정도로 삼국지연의가 조선에 미치는 영향은 컸다.  18세기 이후 인쇄술의 발달로 삼국지연의의 상업적 유통이 매우 활발해졌고, 한글로도 번역되어 부녀자들과 어린이들까지 독자의 폭이 넓어지며 축약본이나 편집본이 등장할 정도로 유행하였다. 출간된 책에는 소설 내용의 이해를 돕는 삽화들이 수록되었고, 이를 토대로 19세기 이후 그림으로 제작된 ‘삼국지연의도’라는 화제가 더불어 성행하였다.  당시 한양을 노래한 「한양가漢陽歌」나 유득공柳得恭[1748-1807]의 『경도잡지京都雜誌』 등에 <삼고초려도三顧草廬圖>가 등장하여 당시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삼국지연의도」는 여러 폭으로 그려지거나 삼고초려도 한 장면으로 대표되기도 한다. 이 「삼국지연의도」는 총 10폭의 병풍으로 구성되어 유비, 제갈량, 관우, 장비 등 4사람의 이야기 위주로 구성되었고, 특히 유비가 강조된 것이 특징이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도원에서 의형제를 맺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사마휘가 명사를 다시 천거하는 장면, 봉의정에서 여포가 초선을 희롱하는 장면, 조조가 술을 데우며 영웅을 논하는 장면, 관우가 다섯 관문을 지나며 장수들을 베는 장면, 그리고 유비가 한중왕 자리에 오르는 장면 등은 다른 삼국지연의도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두 번째, 세 번째 장면은 삼고초려 장면에 할애하였고 적벽대전과 같은 주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양한 고사들 중에 화가가 장면을 취사선택하여 그림을 그렸으며, 이는 제작을 의뢰한 주문자의 취향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있다. 관련정보 MEDIA N | 국립중앙박물관

한궁도 병풍(漢宮圖屛風), 조선, 가로 296.4cm, 세로 97.0cm

비단 바탕에 채색으로 그린 6폭의 누각산수도(樓閣山水圖) 병풍으로 작가와 제작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궁중 화원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건축물의 형태나 나무의 식생 등으로 보아 현실이 아닌 어딘가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장소를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청록의 산, 토파 등을 지그재그로 배치하여 사선구도를 이루는 구성은 각 폭이 하나의 장면이 아닌 6폭이 하나의 장면을 이루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그림의 소재와 관련하여서는 고종 연간에 경복궁에 소장되어 있던 19세기 간본(刊本) 가운데 『명수화보(名數畵譜)』에 ‘漢宮圖(한궁도)’ 항목이 있어 관련성이 주목된다. 이는 19세기에 궁중으로 유입된 일본화보와 조선 화단의 영향관계의 가능성을 시사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횡폭으로 구성된 이 그림의 구도와 경물배치, 세부표현 등은 화보와 차이가 있다. 관련정보 MEDIA N | 국립고궁박물관

고종하사 궁중길상서화문자수병풍(高宗下賜 宮中吉祥瑞花紋刺繡屛風), 조선, 세로 90cm, 가로 37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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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왜기공도병(征倭紀功圖屛), 조선, 전체높이 174.0cm, 전체너비 381.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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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 분쵸필 포도율서도 6폭병풍(谷文晁筆 葡萄粟鼠圖 六幅屛風), 일본-에도, 세로(화면) 163.3cm, 가로(화면) 347.6cm, 두께 10.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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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전도(華城全圖), 조선, 전체길이 196cm, 전체너비 37cm, 길이 166cm, 너비 34cm

열두 폭 화면에 우아優雅하고 장엄莊嚴한 면모를 갖춘 화성을 그린 도성도이다. 화성은 팔달산을 주산主山으로 하여 그 산 아래 행궁을 조성하였다.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도시계획원리에 입각해서 정조시대의 이상을 담아 건설되었기 때문에 이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군사적 요충지로 인식되었고, 실학을 바탕으로 그 당시 모든 기술을 집약하여 성곽을 건설하였다. 돌로 성곽城郭을 쌓은 화성은 네 개의 대문과 5개의 암문暗門이 있고, 두 곳의 수문水門이 있다. 대문은 동서남북으로 창룡문, 화서문, 팔달문, 장안문이 있는데, 이 중 장안문과 팔달문은 옹성甕城을 둘렀다. 성곽에는 장대將臺, 공심돈空心墩, 봉돈烽墩, 노대弩臺, 각루角樓, 적대敵臺, 포루.樓 , 포루砲樓, 치성雉城, 포사.舍 등 적의 침입을 방지하는 시설이 확인된다. 성곽은 총 둘레 4,600보(약5.8킬로미터), 위쪽의 두께는 약 2척 정도의 두께로 축조되었다. 화성 내 주요도로는 남북과 동서, 그리고 행국 앞 광로光路가 있다. 남북도로는 주거지 및 상업시설이 발달하였고, 동서도로는 행궁 앞에서 시작되는 도로와 북수문, 방화수유정을 연결하는 북쪽 도로가 있었다. 도성의 중심부에는 광교천이 남북으로 흐르고 있어 도시의 배수나 용수에 역할을 하였다. 수로를 중심으로 민가가 형성되는 천통취락 배치원리에 따라 세천과 중천, 그리고 연못이 민가 배치의 중심 근간이 되었다. 수로에는 녹지 경관이 조성되었는데, 팔달산 일대와 성내외, 그리고 정조의 거둥길인 남북 주도로와 행궁 앞 광로에 소나무와 버드나무가 심어져 있다. 이러한 조림시설은 용연龍淵과 방화수류정, 남은구南隱溝 안에 남지南池가 조성되어 아름다운 경관이 갖춰졌다. 화성도는 산천과 성곽을 중심으로 중요한 지형물인 행궁과 관아건물, 누정樓亭, 사묘祠墓, 등과 외에도 풍속 등을 묘사하고 있다. 나무가 단풍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계절은 가을이다, 성곽의 표현이 비교적 세세하고 꼼꼼하게 묘사되어 있다. 화면상으로는 맨 위 북쪽에 서장대, 그 아래에는 화성행궁이 자리하고 있다.

벚꽃놀이도병풍, 일본-에도, 세로 150.0cm, 가로 355.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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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츠쿠시마 와카우라 병풍(嚴島和歌浦圖屛風), 일본-에도, 세로 164.5cm, 가로 355.2cm

관련정보 MEDIA N | 국립중앙박물관

겐지모노가타리병풍(源氏物語屛風), 일본-에도, 세로 151.0cm, 가로 350.0cm, 전체높이 168.0cm, 전체너비 365.2cm, 두께 11.0cm

일본 헤이안시대의 대표적인 문학작품인 ″겐지이야기(源氏物語)″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원래는 병풍 한 쌍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한 쪽 만이 전해진다. 양식적인 측면에서는 도사 미츠오키(土佐光起, 1539-1613) 전통을 따르고 있으며, 에도시대의 17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화면의 오른쪽에는 겐지모노가타리의 제 7장의 에피소드가, 오른쪽에는 제51장의 에피소드가 묘사되어 있다. 화면 중간의 여성들이 헤이안시대가 아닌 에도시대 복장을 한 것은 제작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반영하고 있다. 관련정보 MEDIA N | 국립중앙박물관

왕세자탄강진하도 병풍(王世子誕降陳賀圖屛風), 조선, 가로 43.5cm, 세로 269.0cm

1874년(고종 11) 2월 고종(高宗)의 둘째 아들인 순종(純宗)의 탄생을 축하하며 관원들이 진하(陳賀)했던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제2폭에서 제8폭에 걸쳐 그려진 그림은 전체적으로 평행사선구도가 이용되었으며 진하례(陳賀禮) 광경은 부감법(俯瞰法)을 써서 표현하였다. 진하례가 열리고 있는 창덕궁 인정전을 중심에 배치하고 양쪽 옆으로 주변의 다른 건물들과 나무, 산봉우리 등을 그렸다. 인정전 건물의 기둥과 벽면을 높게 표현하여 실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인정전 안에 오봉병(五峰屛)을 펼친 임금의 자리를 중심으로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관리들, 의식의 진행을 맡은 이들과 음악을 담당한 악대, 고종 임금의 가마, 종친과 무관들, 의장대 등 당시 행사에 동원된 모든 인원과 여러 기물들을 밝고 선명한 색채로 표현하였다. 제1폭과 제10폭에는 관원들의 이름과 관직, 품계 등이 적혀있다. 필묘와 채색, 묘사 면에서 다소 수준이 떨어지고 규모가 작은 것으로 보아 궁중에서 보관하는 병풍이 아닌, 당시 관원들이 제작하여 나누어 가진 계병(禊屛) 중 한 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정보 MEDIA N | 국립고궁박물관

행실도십곡병풍(行實圖十曲屛風, 五倫行實圖, 孝子圖, 兄弟圖, 漢나라 薛包의 고사, 한글), 조선, 세로 87.6cm, 가로 3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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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훼도병풍(花卉圖屛風), 일본-에도, 전체높이 175.0cm, 두께 11.4cm

화훼도병풍(유물번호 구2876)과 한 쌍이다. 오가타 고린(尾形光琳 1658-1716)의 전칭 작품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19세기의 림파 작 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병풍의 좌우에 ″호쿄고린(法橋光琳)″이라는 낙관과 도장이 있다. 금지에 수묵 착색으로 화초를 묘사하고 있으며, 화면을 가득 채운 구도는 림파의 후기 표현 이라고 할 수 있다. 병풍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봄, 여름, 가을의 흐름에 맞도록 풀과 꽃이 그려졌다. 관련정보 MEDIA N | 국립중앙박물관

삼국지연의도 병풍(三國志演義圖屛風), 조선, 가로 54.8cm, 세로 169.0cm

삼국지연의도(三國志演義圖)로 꾸민 4폭 병풍으로 작자와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화원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각각의 화면은 삼국지연의의 내용 중 극적인 장면을 담고 있다. 전체적으로 지그재그형의 구도를 사용하여 동적인 느낌을 주었고, 인물의 다양한 모습과 동세(動勢)를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다. 각 장면은 삼국지연의 내용 가운데 어떤 장면인지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려우나 제1폭은 제갈공명(諸葛孔明)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마차를 타고 가는 모습이고, 제2폭은 장비(張飛)가 장판교 위에서 대군이 있는 듯 고함을 질러 조조 군을 물리치는 장면으로 추정된다. 제3,4폭은 제갈공명이 꾀를 내어 조조군의 화살을 빼앗아 오는 장면과, 주유(周瑜)가 화공을 놓는 적벽대전(赤壁大戰)의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정보 MEDIA N | 국립고궁박물관

십장생도 병풍(十長生圖屛風), 조선, 가로 350.4cm, 세로 187.5cm

십장생(十長生)을 주제로 그린 10폭 병풍이다. 그림의 좌측 상단의 붉은 해는 주변 하늘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이고 있다. 하늘에는 학 세 마리가 날고 있고 나머지 학은 소나무와 바위 위에 서 있다. 소나무는 한 그루, 두 그루씩 무리지어 모두 여섯 그루가 있고 그 사이에는 사슴이 노닐고 있다. 사슴은 크게 두 무리로 나눌 수 있는데 화면 좌측으로 향하는 무리와 화면 우측으로 향하는 무리로 나눌 수 있다. 화면 좌측은 물가 풍경으로 거북이 네 마리가 서기를 뿜으며 헤엄치고 있다. 그 밖에 화면 좌우에 복숭아나무가 있고 하단에는 불로초가 그려져 있다. 멀리 원산은 청색, 녹색, 홍색을 사용하여 구륵법으로 묘사하였다. 관련정보 MEDIA N | 국립고궁박물관

평생도병풍(平生圖 屛風)

사람이 태어나서 출세하고 죽을 때까지의 일생을 그린 그림. 평생도(平生圖). 장방형의 8폭 병풍(세로 129.5, 가로 50). 수묵채색화(水墨彩色畵). 견본채색(絹本彩色). 각 폭에는 돌잔치·관례·혼례·장원급제·감사부임·회혼 등이 그려짐. 옅은 먹으로 윤곽을 표현하고, 주로 녹색과 남색, 옅은 주황색을 사용하여 채색함. 관련정보 MEDIA N | 국립민속박물관

화훼도병풍(花卉圖屛風), 일본-에도, 전체높이 175cm, 두께 11.4cm

화훼도병풍(유물번호 구2875)과 한 쌍이다. 오가타 고린(尾形光琳 1658-1716)의 전칭 작품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19세기의 림파 작 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병풍의 좌우에 ″호쿄고린(法橋光琳)″이라는 낙관과 도장이 있다. 금지에 수묵 착색으로 화초를 묘사하고 있으며, 화면을 가득 채운 구도는 림파의 후기 표현 이라고 할 수 있다. 병풍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봄, 여름, 가을의 흐름에 맞도록 풀과 꽃이 그려졌다. 관련정보 MEDIA N | 국립중앙박물관

사적 제122호 창덕궁 옥류천(소요정, 취한정, 취규정)

소요정(逍遙亭), 창덕궁 후원의 옥류천에 위치한 정자다. 정, 측면 1칸의 익공계 사모지붕 형식을 하고 있다. 숙종·정조·순조 등의 임금들이 이곳에서 보이는 경치에 대한 시를 남겼고 청의정, 태극정과 함께 삼림삼정(三林三亭)이라 불렸다.  취한정(翠寒亭), 옥류천 어귀에 자리잡은 정자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이며 팔작지붕을 올리고 납도리로 엮은 민도리집 형태를 하고 있다. 임금이 옥류천의 어정(御井)에서 약수를 마시고 돌아갈 때 잠시 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정자다. 취규정(聚奎亭), 옥류천 산마루 언덕 위에 위치한 정자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사방이 트인 초익공 홑처마 팔작지붕 형태다. 1640년(인조 18)에 세워졌으며 학자들이 모인다는 뜻을 가진 취규정이란 액호로 보아 휴식과 독서를 위한 정자로 보인다. 관련정보 MEDIA N | 문화재청

사적 제122호 창덕궁 성정각

성정각은 희정당을 지나 후원 가는 길옆에 위치하였으며, 이 권역은 과거 동궁에 포함되는 영역이다. 성정각은 조선시대의 동궁(東宮)에 속한 전각이자 세자가 학문을 연마했던 곳이다. 본래 세자의 공부방이었으나 일제 강점기에는 이 일대가 왕가의 내의원으로 쓰였다. 성정각은 단층의 몸채에 중층의 날개채가 직각으로 붙은 모습이다.  성정(誠正)이라는 명칭은 공자의 유교 경전인 대학(大學)에 나오는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이라는 말에서 따왔으며 학문을 대하는 정성과 올바른 마음가짐을 뜻한다. 날개채의 남쪽에는 보춘정(報春亭)이라는 현판을 달았고 동쪽으로는 희우루(喜雨樓)라고 현판을 달았다.  관물헌은 성정각(誠正閣) 북쪽에 위치해있다. 갑신정변 때 김옥균 등의 개화당은 창덕궁 중에서도 가장 협소한 관물헌으로 고종을 이어하게 하였고, 이곳을 그들의 작전본부로 삼았다. 개화당이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소수의 병력으로도 청군(淸軍)의 공격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관련정보 MEDIA N | 문화재청